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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지은 "사피엔스 Sapiens"
인류의 역사를 유인원부터 현생 사이보그까지
일관되게 조망한 역사와 문명비평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흥미로운 책...
3번에 걸쳐 독서후 정리를
소감을 올려겠습니다.
2013년 플랑크 위성의 관측 결과 우주의 나이는 약 138억. 빅뱅 이후 우주에는 물질과 에너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약 38억년 전 지구에는 생물이 탄생했다. 그리고 약 25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유인원이 출현했고, 이들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 에렉투스 등으로 진화했다. 현생 인류의 조상으로 알려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것은 약 10만년 전이다.
저자는 여러 종의 유인원들이 지구상에 출현했다가 사라졌는데 같은 종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지구에는 각기 다른 여섯 종의 유인원들이 살았는데 모두 멸종하고, 이 중 호모 사피엔스만이 현재까지 진화하며 생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그러면서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를 정복하고, 지구의 주인공이 되었나를 생물학, 인류학, 역사학, 경제학, 사회 정치학적으로 독창적이고 흥미진지 하게 설명을 한다.
호모 사피엔스에 3개의 큰 혁명을 거쳤다. 약 7만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 약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 그리고 약 5백년 전 과학혁명이다. 그런데 어쩌면 마지막 혁명인 과학혁명이 사피엔스, 즉 인류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른다고 예견한다. 이것이 이 책의 주된 주제이다.
이 책은 인류의 생물학적 접근을 중심으로 인류의 출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하고 흥미로운 사건이나 기록, 유적 등을 통해 재미 있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러면서 인류의 보편적 특징을 이루고 있는 여러 사회 문화적, 정치 경제적 현상과 특징을 인류사적 관점에서 분석해 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그 동안 우리가 사건 중심의 단편적인 역사를 뛰어넘어 보다 통솔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1. 인지혁명 |
인간이 농경사회가 출현하기 전에 수렵채집을 하던 시기는 40만년 전부터였고, 인간이 먹이사슬의 정점이 된것은 불과 10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면서 부터였다. 이를 수렵 채집인의 시기라 하는데, 구체적인 생활상을 현재까지 남아있는 빈약한 고고학적 증거 만을 가지고 오늘날 재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수렵 채집인이 가장 큰 진보를 이루게 된 계기는 불의 사용이다. 인간이 불을 통제하면서 큰 변화와 진화를 가져 왔다. 불 덕분에 익힌 음식을 짧은 시간 안에 먹을 수 있고, 더 작은 치아와 더 짧아진 창자로 이동성이 강화 되었고, 불을 이용하여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상상을 통해 복원된 얼굴. 호모 루돌펜시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또 다른 사피엔스의 강력한 무기는 바로 언어였다. 사실 언어는 사피엔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원숭이를 포함하여 모든 종들도 자신만의 고유의 언어를 지니고 있고, 언어를 통해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러나 사피엔스 언어의 차이점은 유연함이 있는데 이를 통해 무한한 문장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유연한 언어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협력이 가능했다. 여기서 협력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대상을 서로 믿고 전달하고 공유하는 것까지 말한다. 다시 말해 전설, 신화, 신, 종교 등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과 이런 허구를 통해 공통의 믿음을 창조하면서 원시부족, 고대도시, 중세교회, 현대국가 등을 이룰 수 있었다. 현대 사회의 여러 특징인 법인(회사), 신용(대출), 제도, 투자, 교역, 민주주의, 시민사회 등도 이러한 허구의 믿음을 기초로 파생되었다.
인지혁명 이후 인간들은 수렵채집 사회를 구성했고, 무리를 이루어 식량을 찾아 다녔다. 매일 식량을 찾는 과정에서 약간의 지식도 필요했을 것이고, 효율성을 위해 각 식물의 성장 패턴과 동물들의 습성에 대한 정보도 함께 축적해 나갔을 것이다.
이들은 가끔 자기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땅을 헤매기도 했다. 재해, 폭력, 분쟁, 인구 증가 또는 지도자의 결단 등의 원인이었다. 이런 방랑은 인간이 외부 세계로 팽창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들은 식량을 말리고 훈제하고 냉동하는 기술 덕분에 좀 더 오래 한 곳에 머무는 것이 가능해졌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해산물과 물새가 풍부한 바닷가와 강변을 따라 여러 어촌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농업혁명보다 훨씬 앞선 역사상 최초의 영구 정착지였다.
그런데 우리가 수렵채집인들의 삶을 흥미롭게 살펴볼게 있다. 수렵채집 생활이 농업혁명과 과학혁명 시대보다 훨씬 더 안락한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들은 중세나 현대인보다 훨씬 작은 시간을 일했다. 인근의 숲이나 초원을 오가며 버섯을 따고 먹을 수 있는 뿌리를 캐고 개구리를 잡았다. 남는 시간에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지어낸 이야기를 하면서 한가롭게 보낼 수 있었다. 야생에서 가장 이상적인 영양소를 얻었고 신체 역시 여기에 잘 적응했다. 고대 수렵채집인은 후손인 농부들보다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는 일이 적었으며, 화석 뼈에 나타난 증거에 따르면 키가 더 크고 신체도 건강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결은 다양한 식단에 있었다. 농업혁명 이후 인간은 매우 제한된 종류의 식품을 먹으며 불균형적인 식사를 했고 칼로리의 대부분은 밀이나 감자, 쌀 등 단일 작물에서 왔다. 단일 작물은 비타민, 미네랄을 비롯한 인간이 필요로 하는 여타 영양소가 부족하다. 그러나 수렵채집인은 수십 가지의 다양한 식품을 규칙적으로 먹었다. 게다가 단 한가지 식량에만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식량의 공급이 끊어져도 문제가 덜했다. 농경사회는 가뭄이나 화재, 지진 때문에 쌀이나 감자 농사를 망치면 기근에 휩싸였다. 수렵채집사회도 자연재해를 당하고 결핍과 굶주림의 시기를 겪었지만 대체로 이런 재앙을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주식이 되는 일부 먹을 거리를 구하지 못하면 다른 것을 사냥하거나 채집할 수 있었고, 영향을 덜 받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건강에 유익한 음식을 다양하게 먹고 주당 일하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짧았으며, 전염병도 드물었으니, 많은 전문가는 농경 이전 수렵채집사회를 최초의 풍요사회라고 불렀다. 그러나 노인이나 장애인을 버리거나 죽이는 일이 있다. 원치 않았던 아기나 어린이는 살해될 수 있으며 심지어 종교적인 인신공양 사례도 존재했다. 1960년대까지 파라과이에 살았던 아체족의 생활상을 통해서 이런 관행이 남아 있음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한편, 고대 수렵채집인 사이에는 애니미즘적 신앙이 있었다. 샤먼을 통해 정령의 도움과 기원을 빌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호모 사페엔스 지구 이동경로]
2. 농업혁명 |
대략 1만년전부터 수렵채집 시대에 변화가 시작됐다. 더 많은 곡식과 과일 고기를 얻기 위해 씨를 뿌리고 양을 기르기 시작했다. 즉 농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인류가 농업을 이행한 것은 기원전 9,500~8,500년경 터키 남동부 등지에서 시작되었다. 염소는 기원전 9,000년경, 완두콩은 기원전 8,000년경, 올리브나무는 기원전 5,000년경, 포도는 기원전 3,500년경, 말은 기원전 4,000년경부터 기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늘날 인류를 먹여 살리는 칼로리의 90%이상이 밀, 쌀, 옥수수, 감자, 수수, 보리처럼 우리 선조들이 기원전 9,500년에서 3,500년 사이에 작물화했던 식물들에서 왔고, 지난 2천년 동안 주목할 만한 작물화나 가축화는 없었으니 어떻게 보면 우리의 마음은 수렵채집인 시대의 것이라면 우리의 부엌은 고대 농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집트 무덤에서 발견된 3,500년전 벽화. 농사현장]
농업혁명 덕분에 지구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향유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 열심히 일한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는데 인구 폭발과 엘리트 지배 계층이 출현한 탓이 크다. 왕이나 사제 등의 지배계층의 착취나 상인의 폭리만은 아니다. 되려 밀과 같은 작물 때문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작물들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밀을 재배하기 위해 인간의 많은 노동력이 요구됐다. 밭을 고르고, 잡초를 뽑아야 했고, 메뚜기 떼를 막아야 했고, 물을 대야 했다.
유인원이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상당히 편안하게 살았지만 작물을 재배하면서 인류는 더 많은 노동을 해야 했다. 고대 유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피엔스의 신체는 농업혁명 이후 디스크, 관절염, 탈장 등 수많은 병이 생겨났다. 농업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간들은 야생동물이나 비, 추위로부터 보호받고 평온한 삶을 누렸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수렵채집인의 삶보다 불안정했다. 자연재해 등으로 흉작이 들면 많은 사람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허덕이고 죽어가야 했다. 농업은 놀라운 기술의 발견과 개선, 역사발전이라 가정할 수 있겠으나 수천 년의 역사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고대 수렵채집시대의 유적지 괴베클린 테페의 거대한 돌기둥을 보면 엄청난 인력이 동원된 것을 추정할 수 있는데 그 인근에서 작물화된 밀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기 위해 더 많은 식량이 필요로 하고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배계층의 출현으로 성이나 거대한 신전 등을 신축하는데 안정적인 식량의 공급이 필요했기 때문에 작물의 재배가 가속화 되었다.
농업혁명의 희생자들은 일반 피지배계층뿐 만 아니라 동물들도 해당된다. 가축화된 동물들 입장에서 보면 농업혁명은 끔찍한 재앙이었다. 양, 닭, 염소, 돼지, 소 등이 가축화되면서 야생 때보다 평균 수명이 훨씬 짧아졌다. 야생 수명이 닭은 7~12년, 소는 20~25년인데 이들은 각각 3개월, 1년내에 사육된 후 도축되었다. 또 가축화 과정에서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가거나 채찍에 휘둘려 본래의 욕망과 충동에 맞지 않는 생활방식에 순종해야 했다.
[기원전 1,200년경 이집트 벽화, 가축화된 소]
농업혁명은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사건 중 하나다. 일부에서는 그 덕분에 인류가 번영과 진보의 길에 들어 섰다고 주장하지만 일부에서는 파멸을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사피엔스가 자연과의 긴밀한 공생을 내던지고 탐욕과 소외를 향해 달려간 일대 전환점이 된 것이다.
어째든 기원전 1만년경 지구에는 5~8백만명의 수렵채집인이 살고 있었지만, 기원후 1세기경에는 1~2백만 정도 밖에 남지 않았고, 농부들의 숫자는 2억5천만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엄청난 영토를 방랑하는 수렵채집 인에 비해 새로운 농부들은 훨씬 더 좁고 인공적인 섬과 같은 지역에 갇혀 살게 되었다.
수렵채집인들은 미래가 중요하지도 걱정도 없었다. 먹을 거리를 저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장기 계획을 세우는 데 한계가 있었고 그 덕분에 역설적이게도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농업혁명 덕에 미래는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고, 농부들은 언제나 미래를 의식하고 그에 맞춰서 일해야 했다. 내년, 내후년까지의 식량을 걱정해야 했다. 농업의 도래와 함께 비로소 인간의 마음속 극장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주연배우가 되었다.
이와 함께 외부로부터의 침입 등을 막기 위해 이를 보호하는 지배자와 엘리트가 필요했고 등장했다. 이들은 농부가 생산한 잉여식량으로 먹고 살면서 농부에게는 겨우 연명할 것 밖에 남겨주지 않았다. 이렇게 빼앗은 잉여식량은 정치, 전쟁, 예술, 철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들은 왕궁과 성채, 기념물과 사원을 지었다. 그들의 잉여 생산이 소소의 엘리트를 먹여 살렸다. 인류가 농업혁명 이후에 도시와 왕국, 제국이 출현하는데 불과 몇 천 년밖에 걸리지 않아 대규모로 협력하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본능이 진화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기원전 5~4천년 사이에 나일강 유역에는 인구 수만 명의 도시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파라오는 수천 제곱 킬로미터에 사는 수 십만 명의 백성을 다스렸다. 기원전 221년 진 제국이 중국을 통일했고 기원후 1년 로마는 지중해 분지를 통일했다. 로마 제국의 최 전성기에는 최대 1억명의 백성에게서 세금을 걷었다. 그 수입으로 25~50만명의 상비군, 지금도 쓰이는 도로망, 대형행사가 열리는 극장과 원형극장을 만들고 유지했다. 이런 인간이 만든 협력망은 대부분 압제와 착취에 적합하도록 맞춰져 있었다.
어떻게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진 제국과 로마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인간은 공통의 신화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신화 두 개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기원전 1776년 경의 함무라비 법전과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고대 바빌로니아인 수십만 명의 협력 매뉴얼 역할을 했고, 독립선언문은 현대 미국인 수억 명의 협력 매뉴얼 기능을 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관점, 특히 평등에 관점에서 보면 두 개의 신화는 반대의 내용이지만 그 시대의 질서, 위계질서를 만드는 강력한 신화로서 역할을 했다. 사피엔스의 풍부한 상상력과 그들이 지어내어 서로 들려주는 신화인 것이다. 중국 제국이 유교의 근본인 인, 예, 효를 신봉하지 않았다면 2쳔년 넘게 존재할 수 없었다. 현대 사회도 투자자와 은행가 대다수가 자본주의를 신봉하지 않는다면 경제 시스템은 단 하루도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그들만의 사회 규칙이 생물학적 DNA에 내재화 되어 있다. 인간은 단순한 축구라는 게임 하나도 DNA에 내재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을 외부화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면서 하나의 게임이 존속할 수 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제도와 정보를 다루게 되는데 무엇보다 숫자가 필요했다.
사람마다 각기 세금을 부과하고 걷고, 이를 저장하는 것은 기억으로는 불가능하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수메르인 들이 처음 숫자를 사용했다. 기원전 3,500~3,000년 전 1, 10, 60, 600, 3,600, 36,000 등의 6진법과 10집법의 기호를 남겼다. 또 다른 기호는 사람, 동물, 사유품, 토지, 날짜 등을 나타냈다. 두 유형의 기호를 결합함으로써 수메르인 들은 많은 데이터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후 좀 더 복잡한 문자체계를 추가하여 쐐기문자라고 불리는 완전한 문자체계로 점차 바뀌었다. 기원전 2,500년경 왕이 포고령을 내릴 때, 사제들이 신탁을 기록할 때, 시민들이 편지를 쓸 때도 이 문자가 사용되었다. 또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인들은 상형문자를 개발했다. 기원전 1,200년경 중국에서, 기원전 1,000~500년경 중미에서도 개발했다. 그러나 이런 글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기록들을 잘 분류하고 저장하고 검색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이런 일을 체계적으로 하는 것은 인간의 뇌나 생물학적인 DNA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런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사람을 뽑아 교육시키고 양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관료제도의 시작이다. 관료제도를 통해 인간의 제국은 계속하여 커질 수 있었다. 이후 9세기 즈음에 새로운 문자체계, 바로 0에서 9에 이르는 열 개의 기호였다. 인도인이 처음 발명했고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바로 그것이다. 숫자는 중동으로 유럽으로 퍼졌고 더하기, 빼기, 곱하기 등의 부호가 추가되면서 현대 수학적 표기법의 기반이 출연하게 되었고, 세계의 지배 언어가 되었다.
모든 정보는 엄청난 속도와 효율로 저장되고 펼쳐지고 처리된다. 최근에는 더더욱 혁명적인 체계가 출현하였는데 컴퓨터화된 2진법이다. 인간이 거대한 역사를 창조하고 협력 망으로 엮였을까? 그런 망을 지탱할 생물학적 본능이 결핍된 상태에서 말이다. 그것은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체계를 고안해 냈기 때문이다.
[기원전 3,400년경, 우루크의 행정문서가 적혀 있느 점토판]
인간의 모든 사회는 상상의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다. 1776년 미국의 독립 선언문에서 수립한 가상의 질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선언했지만 또 다른 위계질서를 확립했다. 남녀간, 백인과 흑인간, 부자와 가난뱅이는 계층이 다르고 다르게 대접받는다고 했다. 자유란 단어도 국가는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면 시민의 사유재산을 압수하거나 그 재산으로 어떤 일을 하라고 시민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의미일 뿐 이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노예는 신이 정해놓은 것이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는 맹종하는 본성이 있고 자유민 에게는 자유로운 본성이 있다고 주장했고, 인도의 카스트제도에는 브라만과 수드라 등 계급을 정했다. 그러나 생물학적 본성의 차이가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면 무엇이 이런 위계를 만들었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상상력일 뿐이며, 따라서 그 상상력의 질서를 살피고 보다 나은 질서를 만드는 것 또한 자유이고 권리이다.
[기원전 1,776년경, 함부라비 법전이 새겨진 석주]
수렵채집사회에서는 모계사회였으나 농업 혁명을 계기로 부계사회로 바뀌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사회학적 분류는 생물학적인 분류인 남성과 여성과는 다르다. 생물학적인 차이는 고대나 현대나 동일하지만, 사회학적인 젠더로서 남자 여자는 고대와 현대와는 완전히 다르다. 농업 혁명 이후 남자를 여자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부계사회를 이루었다. 가부장제가 지금도 지배한다.
이유가 있을까? 농업이나 노동이 필요한 가운데 남자는 힘든 일을 독점할 수 있었고 덕분에 식량생산을 통제할 수 있었고, 이것이 정치적 영향력, 사회적 영향력으로 전통을 만들었다. 또 생물학적으로 공격성 덕분이란 분석도 있다. 또 수백만에 걸친 진화를 통해 가부장제가 정착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남자가 가임기 여성을 임신시킬 기회를 놓고 서로 경쟁할 때 이기는 공격력에 달려 있고 여자는 자궁 속에서 9개월간 아기를 힘들게 품어야 했고, 출산 후에는 오랫동안 양육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식량을 구할 기회가 평소보다 줄었고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자기를 보호하고 지켜줄 강한 남자가 필요했다. 자신과 자녀의 생존을 보장하려면 남자가 내세운 조건을 뭐든 받아들이는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상상력의 변화 때문이다. 또 지난 세기를 거치면서 젠더의 역할은 커다란 혁명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회가 남녀에게 동등한 법적 지위와 정치적 권리, 경제적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젠더의 역사가 그토록 혼란스러운 것이다. 가부장제가 생물학적 사실보다 근거 없는 신화들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이 제도가 이토록 보편적이고 안정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계속)
[18세기 남성성, 루이 14세 초상화]
계속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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